내가 어렸을 때의 얘기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 머니, 삼촌들, 그리고 형들, 동생들, 10명이 넘는 많은 식구가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저녁을 먹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저편 아랫목에 따로 상을 놓고 잡수시고 삼촌들도 따로 이쪽 편에 상을 놓고 잡수신다.
그리고 졸병인 우리 형제들은 동그란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어머니는 맨 마지막에 허연 때가 낀 쟁반에 눌은밥까지 긁어가지고 오셔서 저쪽 윗목에 앉아서 잡수신다.
반찬이라야 가짓수가 많지도 않다.
여름철이면 짬무와 짠 오이를 썰어서 냉수에다 담근 것이 주된 반찬이다.
파를 좀 썰어놓고 고춧가루가 좀 뿌려져 있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도 허구한 날 먹은 거라서 그런지 별로 맛이 없다.
지금은 반찬을 먹기 위해 밥을 먹지만, 옛날엔 밥을 삼키기 위해 반찬을 먹었다고나 할까?
여러 형제가 짠 김치그릇 안으로 번갈아 숟가락을 집어넣는다.
그러면 어떤 때는 형이 숟갈을 넣다 말고 째려본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야, 너 숟가락 좀 못 빨아! 자꾸 밥알 묻어 들어오잖아!」
형의 무서운 눈초리 금방이라도 한 대 맞을 것만 같아 동생은 지레 겁먹고는, 김치그릇에 숟가락을 얼른 못 집어넣는다.
집어넣기 전에 밥알 묻었나 유심히 살펴보면서, 깨끗이 하느라고 몇 번을 더 입에다 넣고 쭉 빤다.
그러면 이번엔 형이 더 큰 소리로 야단친다.
「인마, 그렇게 자꾸 쭉 빨면 더 더러워! 너는 밥도 먹을 줄 모르냐!」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아까 형이 쪽 빨랬잖아.」
「누가 그렇게 빨라고 했어, 밥알 묻지 않게 하랬지.」
「이게 밥알 안 묻게 쪽 빠는 거란 말이야!」
「근데 이게 왜 자꾸 말대꾸를 하고 그래!」
동생은 숟갈을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일어선다.
그러면서 옆에서 식사를 하시던 어른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하면서 야단을 치신다.
결국 형마저도 그냥 숟가락 놓고 일어서고 만다.
형제들 간의 싸움은 밥 먹을 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한바탕 싸우기가 일쑤다.
좁은 방안에 여러 명이 한 이불을 덮고 자다 보면, 이불이 작아서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다가 싸움을 할 때가 많다.
이렇듯 옛날에는 여러 식구가 더불어 살면서, 비록 부족했지만 나눠 먹는 방법을 터득했다.
즉, 얼마만큼 이 내 몫인가도 눈치로 따져서 알아차렸다.
일곱 명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밥상 위에 참으로 어쩌다가 꽁치 두 마리가 올랐다.
그러면 이때 산술적으로 계산을 안 해도 멀찌감치 놓여있는 한 마리를 통째로 날름 가져다 먹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마리 중에서 내가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만 먹으면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식사가 끝날 것인가를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면서 자랐다.
여러 식구가 함께 더불어 사는 가운데, 우리가 터득한 사회적 기능의 한 가지가 바로 나누어 먹고 남의 몫도 있음을 생각할 줄 알고, 또 싸움은 어떻게 끝내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고 하는 따위였다.
이에 비하여, 지금의 신세대 아이들은 단출한 가족구조 내에서 성장을 하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계시고, 형제라야. 자기 혼자 아니면 위나 밑으로 하나 모두 합쳐 둘, 많아야 셋 정도인 경우가 고작이다.
상대적으로 수는 적고 먹을 것은 많아졌으나 식탁에서 굳이 나누어 먹는 일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 그렇게 옛날처럼 많거나 심각하지 않다.
자기에게 할당된 것만 먹어도 남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남의 몫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띠로는 혼자 앉아 풍성한 음식을 먹다 보면 그저 모든 것이 내 것인 양 느껴질 뿐 남의 몫이라는 것을 눈곱만큼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이러한 가운데서 지금의 아이들은 어쩌면 자기중심적인, 자기 본위적인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가족 제도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역할을 가족 구성원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할머니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노인들이 계시고, 엄마 아버지가 계시고, 또 부모님보다는 좀 덜 어려우면서도 껄끄러운 삼촌이나 고모도 계시고, 아주 무서운 형도 있고, 대충은 맞아도 되는 작은형도 있고, 또 남동생 여동생들도 여러 있다.
그러한 가족관계에서 우리네는 여러 가지를 듣고 보면서 자랐다.
할머니한테는 특유의 옛날 얘기를 들었다.
거짓말 같은데도 끝이 궁금해가지고는, 「그래서 어떻게 됐데.......」하면서 자꾸 더디게 말하는 할머니를 채근 대며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한테는 또 할아버지다운 인자하면서도 엄한 말씀을 들었고, 삼촌이나 고모, 형들, 동생들한테도 마찬가지로 많은 얘기를 듣곤 했다.
집 안에는 늘 어려운 어른이 계셨고, 말버릇이나 행동에 대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누구한테 책잡힐지 모르면서 자랐다.
또 그러한 다양한 연령층의 가족 구성원이 있다 보니 집 안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다양했다.
동네에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이웃집 아저씨, 이웃동의 형들, 참으로 여러 연령층 사람들을 접하면서 자랐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쩌면 이때부터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들한테나 또 내 집 식구들과 가까이 지내는 동네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예의라든가 행동을 몸소 겪고 배우면서 자랐지 싶다.
지금 당신의 자녀가 흔들리고 있다/ 이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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