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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엑스트라 인생을 원하십니까?/익숙해지면 괜찮은 일들

by 책통지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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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인생을 원하십니까?
 

 휴일 오후 시간, 청소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방송국에 갔는데 방송국의 본관 입구에서 이 드라마를 촬영 중이었습니다.

 

 누구나 알 만한 여자 탤런트 두 명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을 찍는데 몇  초짜리 장면에서 자꾸 엔 NG를 내니까 같은 장면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찍을 때마다 오가는 엑스트라들, 긴 마이크를 쳐들고 옆에서 같은 보조로 걸어줘야 하는 사람, 조명팀,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혹은 밀면서 오가는 촬영팀이 다시 움직여야 했습니다. 몇 번을 실수가 반복되자 감독은 두 탤런트를 불러 옆에서 보는 사람이 무안할 만큼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장면도 간단한 장면이었지만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기가 안 나오냐는 식의 야단을 듣고 나서야 겨우 촬영을 끝내자 주변에 들러서 구경을 하고 있던 꼬마들이 남의 마음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가서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무심하게 지나가 버리는 5-6초짜리의 한 장면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반복과 자존심 상하는 노력이 있었는지 보는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모습으로 어제도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생활의 한순간을 따온 것처럼 생각되는 그 장면들이 저토록  많은 노력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서 이뤄지는 일이란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공개 방송은 4시부터 시작되는데 대개 한 시간 전까지는 꼭 도착하라는 방송국의 속성을 알기 때문에 제가 촬영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한 시간 빠른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모두들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기다리는 동안 옆자리에 히피 차림도 아니요 제 눈에는 은은히 참 이상한 옷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며 몸을 흔들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누구인가 했더니 나중에 학생들이 '오빠 오빠'하며 쫓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요즘 뜨고 있는 가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노래 한국을 부르기 위해 오전 10시부터 와서 연습하며 대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방송이 끝나고 나니 오후 6시가 지났습니다. 그 오후가 저에게는 지루하고 허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읽고 농담하고 움직이고 프로듀서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촬영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위 속에서도 '오빠'를 외치며 선물을 들고 달려드는  여학생들의 극성스러운 열광과 선물을 전달하고 행복해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더 허전해졌는지도 모릅니다.

 

 인천에서 와서 종일 줄을 서서 기다리다 그래도 그 오빠를 한번 보고 자신이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을 전달했다는 감격에 젖어 돌아서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그들이 오늘 쏟은 시간과 정열은 그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아도 좋다 오직 그 오빠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정열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이 그 시간과 정열을 그렇게 쏟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면 몇 년 후에 그 두 사람의 인생길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방송국을 막 빠져나오는데 야외 잔디밭에 서 파티 장면을 위한 뷔페 음식이 장만되어 있었습니다. 곱게 한복과 양복을 차려입은 엑스트라 연기자들이 잠깐 비추이는 그 장면의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하루 종일 준비하고 대기 상태인 것을 보고 아마 먼 훗날 두 사람의 인생도 이렇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누구는 주어진 역할에서 주연을 하고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러 가는데  누구는 주인공이 걸어가는데 잠깐 뒷모습을 비춰주기 위해서 하루 종일 같은 거리를 걸어야 하고, 하루의 노동의 대가로 누구는 수백만 원을 받아 가는가 하면 누구는 몇만 원의 대가에 만족하며 그 일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연극은 주연 못지않게 조연의 역할도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조연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에 주연을 남에게 내주고 자신은 말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어색한 걸음걸이로 사라지는 조연의 자리 머루를 수는 없습니다.

 

 오늘 철없이 화려한 스타의 겉모습에 빠져서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다 바치고도 행복해하는 이는 먼 훗날 자신의 인생이 화려하게 막 올라야 하는 순간에는 불쌍한 조연의 위치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릅니다. 철없는 사람은 주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는 숨겨진 어려움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이 필요하다> 김형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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